박래전의 시

유고 시집 『반도의 노래』

박래전이 남긴 시 40편을 엮어 49재에 맞춰 출간된 유고 시집 『반도의 노래』(도서출판 세계, 1988)

冬花 (동화)

당신들이 제게 돌아오지 않을 것을 
아는 까닭에
저는 당신들의 코끝이나 간지르는 
가을꽃일 수 없읍니다

제게 돌아오지 못할 것을 아는 까닭에
저는 풍성한 가을에도 뜨거운 여름에도 
따사로운 봄에도 필 수 없읍니다
그러나 떠나지 못하는 건 
그래도 꽃을 피워야 하는 건
내 발의 사슬 때문이지요

겨울꽃이 되어버린 지금
피기도 전에 시들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진정한 향기를 위해
내 이름은 冬花라 합니다

세찬 눈보라만이 몰아치는 
당신들의 나라에서 
그래도 몸을 비틀며 피어나는 꽃입니다

시인에게
- 모독ㆍ1

아직도 시만 쓰고 앉아 있어야 하는가?
아직도 헛소리나 지껄이는 우리이어야 하는가? 
뜨거운 가슴 감추어 두고
핏발 선 눈빛도 가리워두고 
종잇장이나 메우면서 이 세월을 보내야 하는가?

풀빛은 
4월에서 5월로 푸르러만 가는데
곰팡내 풍기는 시만 쓰고 앉아 있을 것인가?

시는 시이니 시를 떠나서 어떤 세계가 존재하리오만
세계 속에 시가 있는 것이냐? 

아니다
모두가 부질없는 장난이다
할 일 없는 놈팽이들의 지껄임이다

두 손에 4월을 움켜쥐고 
5월의 칼에 맞은 혼들이 부르는데
그 아우성이 살아나는데
시멘트 바닥을 적시던 핏방울들이 울부짖는데
넌 아직도 시만 쓰고 앉아 있을 것이냐?

버터덩어리들이 핵폭탄이 되어 
버섯구름 아래 나라가 있고
쪽바리들 열심히 끄는 쪼오리에
깡마른 형제들이 있는데
개들은 쉴 새 없이 짖어대는데
넌 아직도 시만 쓰고 있어야 할 것이냐?

바람일 수는 없다

바람일 수는 없다
한번 불어 흙먼지 일으키고
사라져가는 바람일 수는 없다

마른 땅에
떨어지는 빗방울일 수는 없다
땅 적시고 마르는
빗방울일 수는 없다

바람이려거든
한번 불어 북새풍을 쓸어가는
그런 바람이거라
그런 바람이거라

물이려거든
끊임없이 솟아나는 샘이거라
목마른 자, 메마른 땅
쉬임없이 적시는 그런 샘이거라